2013년 의류 공장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자랴>는 지금 사무실 및 쇼핑 단지가 되었다. <자랴>에는 창의적인 비즈니스를 포함한 다양한 영역의 비즈니스 산업이 모여있다. 2013년에는 자랴 현대 미술 센터가 문을 열게 되었고, 그 덕분에 공장 구역은 거리 예술 작품으로 가득 찬 “야외 미술관”이 되었다.
<자랴 >재봉 협회의 역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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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1901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현존 하고 있는 자랴 공장은 다양한 산업의 합병과 변형을 통해 설립된 봉제 생산공장이다. 1901 년 ~1910 년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해군 군대를 위해 특별 명령으로 맟춤 재봉하던 시베리아 <쉬발냐 피복공장> 승조원 절반은 1910 년부터 노동 취인소로 옮기게 되어, "실업자 집단"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형태로, 공장은 1918 년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차후 1963 년 제 2봉제공장으로 불려지기 전까지, 처음에 <라브쉬베이쁘럼 -봉제산업작업>, <고스쉬베이파브리카- 국가봉제공장>,<토프 파브리카 –환태평양 함대공장"으로 여러 번 이름을 바꾸게 된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두번째 재봉산업은 몇몇 가내수공업이 “타켈라쥬” 협동조합으로 합병된 1928년부터 역사가 시작되었고, 1940년에는 <류빔마야 이그루쉬카 –좋아하는 장난감> 협동조합도 합류하게 되었다. 그들은 <콘스탄찐 수하노브>라는 이름으로 공동작업을 계속했으며, 1956 년 경공업부의 지령에 따라 제1호 봉제공장으로 개편되었다.
제 1호 봉제공장은 예전 <12 킬리미터>라고 불렸던 도시 지역, 지금의 <자랴>공장 구역으로 1958년 이전하게 되었다. 그 당시 <자랴> 공장 구역에는 1층짜리 3개의 건물만 있었지만, 지금은 1층으로된 제1, 2, 3호점의 시설관으로 남아 있다. 이 건물들은 1900년대 초에 지어졌으며, 당시 제 2호 시설관은 마구간, 다른 1,3 시설관은 기병 병사들이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공된 막사를 수리하고 공장의 요구에 맞게 조정 해야 했다. 봉제생산을 중단 하지 않는 조건하에서 모든 건설작업은 직원이 수행했다. 1964 년 부지의 재설비 일부가 완공되었을 때, 아르쪼모브스키 봉재 공장뿐만 아니라 봉제공장 제 1호, 제 2호의 합병이 있었다. 그때부터 <자랴>봉제 생산 연합의 50여년 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12 킬리미터> 지역은 교통 및 주택 인프라가 잘 발달되지 않은 도시 외곽 지역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노력, 인내, 사람들의 헌신 덕분에 공장은 급속히 발전했고, 곧 주요한 지역구 기업이 되었다. 70년대 중반에는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생산에 참여했는데, 대부분은 여성들이었다. <자랴>의 직원을 위한 주거용 주택과 기숙사, 유치원 및 병원을 건립했으며, 곧 공장 주변 지역이 <자랴>로 알려지게 되었다.
군사 막사였던 건물 중 하나이다. 2층과 3층은 1958년부터 1961년까지 건설되었고, 완공 직후 건물들은 가동되었다. 2층에는 여성복, 남성 정장, 학교 교복 등을 재봉하는 봉제 작업장이 있었고, 완제품 창고는 1층에 있었다. 공장에서 생산된 모든 옷은 여기에 보관되었고, 여기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 지역 판매점으로 배포되었다.
같은 건물에 오랫동안 가내 작업반원의 작업공간이 부족하여, 자택에서 재봉을 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한 달에 몇 번 공장 차가 준비된 재단 재료을 집에 있는 직원들에게 제공한 후, 완성된 의류품을 모아 창고로 가져 왔다. 창고에서 직원들은 상품의 품질을 점검하고 <자랴>공장의 브랜드 레이블을 새 양복과 드레스에 봉제한 이후, 상품으로 판매했다.
이 건물은 1961년부터 사용하게 되었다. 수리 중 2 층과 제 1호관 시설관과 제2호 사이를 잇는 육교 통로를 상분 구조로 세웠다. 2층에서는 곡선형에 따라 유행할 패션 드레스와 단정한 남성정장의 재단료를 생산하는 재단 시설관이 있었다. 재단된 재단료는 육교내 있는 모노레일로 재봉 시설관으로 이동된 후, 재봉사자들이 완성된 복장을 만들었다.
실험 시설관은 공장 전체에서 가장 세련되고 창의적인 부서로써 제 2호관 건물의 1 층에 있었다. 공장에서 생산된 드레스, 정장 및 겉옷 모델 개발은 바로 여기에서 진행했다. 또한 실험 시설관에서는 국가표준을 준수에 따라 의류 품질 검사를 실시했다.
한 달에 한 번, 공장 지도자 및 무역 분과의 대표자들이 의류 모델 심사를 위해 실험 시설관에 모였다. 공장 노동자들이 직접 패션 모델로 선발되었다. 남녀 근로자 모델들은 실험 시설관에서 만들어진 최신 유행 디자인의 의류를 선보였고, 패션 공개가 끝난 후 심사위원회는 대량 생산으로 보내어질 의류모델을 선택했다.
1966년에 문을 열게 된 작업 첫날부터 제 3호관 건물은 모자 생산에 전적으로 집중했다. 건물의 3층 실험 시설관에서 개발된 모델로 고급펠트 여성모자, 해리털 모자 및 남녀노소용 다양한 모자를 재봉했다. 또한 공장내에는 군대를 위해 특별주문 제작을 하는 유일한 시설관이 있었고, 여기에서 블로디보스트크와 연해주 군인을 위한 캡, 전투모 그외 군모가 생산되었다.
건물의 2층에서 준비 작업을 수행했으며, 여기에서 옷 모형을 재단하고 모자 제작을 위한 액세서리를 만들었다. 새로운 모자 모델 장식이 될 화려한 단추, 끈, 브로치는 수공으로 제작했다.
1 층에는 모자 제조를 위한 작업실과 완성된 모자 판매 준비를 위한 보관 창고가 있었다.
제 4호관 건물은 공장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았던 시기 1995년에 문을 열었다. 생산이 증가하고 번성하여 회사는 베트남 및 중국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건물의 1 층에는 차고가 있었다. 공장 차는 완성된 의류품을 도시의 판매점으로 배포했다. 당시 프토라야 레츠카, 에게르셀드, 가이다막 같은 도시의 다른 지역에는 <자랴> 공장의 브랜드 매장이 이미 3개가 있었다.
건물의 2층과, 3층에는 재단준비 및 재단 작업실이 있었고, 의류 모형과 재단이 준비되면 재봉 시설관으로 전달되었다.
제 5호관은 1985년에 문을 열었다. 이 건물에는 항상 섬유 수납 및 검사 시설관이었다. 1층에는 섬유 수납 과정이 실시 되었다. 거대한 측정 테이블에서 작업장에서 일하는 팀은 공장으로 들어온 직물롤을 측정하고 공급 업체가 알려준 섬유의 품질과 미터(m)수 일치 여부를 확인했다.
2층 거대한 선반에 직물 창고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 <자랴> 브랜드 이름으로 제봉 되어져야 하는 다음 유행 치마 또는 단정한 바지 재료가 보관되고 있었다.
제1, 2, 5 호관을 잇는 육교 내 모노레일 시스템은 힘든 노동작업을 최대한 자동화 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창고에서 나온 직물은 모노레일로 재단 시설관으로 옮겨졌다. 재단된 옷감은 이미 다른 육교내 있는 모노레일로 재봉 시설관에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생산 과정이 완료되었다. 완성된 의류품은 창고, 그 다음 매장으로 배포되었다.
이 건물에서는 철공, 선반, 목공 작업조나 공장 내 모든기계의 상태를 담당하는 신속한 반응 그룹이 배치되어 있었다. 작업장에서 일하는 전문가팀은 재봉 장비의 설정 및 수리 일을 담당했다. 또한 때로는 실험 시설관에서 새로운 옷 모델과 디자인 도입으로 혁신되는 품종에 맟추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공장 생산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기존장비를 발명하거나 개조하여 가구를 만들었다.
60년대 중반 극동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면서 러시아의 국립 예술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브는 중앙수리공방 작업팀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했다. 그 후, 투어 중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계기로 그는 공장을 방문하여 이전 동료 및 친구들과 이야기를 했다.
경영빌딩건설은 1959년에 시작되고 2년후 완공되어 운영에 들어갔다.1층에서는 공장 이사회가 배치되고 2층은 근로자를 위한 임시 기숙사였다. 특별히 공장의 노동자를 위한 몇 채의 아파트를 건설한 후, 2층은 직원 여가생활을 조직하는 아마추어클럽이형성되었다. 공동소풍, 장기자랑, 도시 행사에 <자랴>의 무용반과 성악반의 공연, 체육대화가 공장의 거대한 공동체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자료는 <자랴> 공장 기록 보관소와 1975년에 <자랴> 공장 기록 보관소 소장인 로진코바 알렉산드라 로마노브나가 기록한 공장 기록 및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